170여 페이지에 달하는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의 책 한 권을 받았다. 『타자와 욕망』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가 딸린 책이다. 부피가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책을 펼친 지 보름을 훌쩍 넘기고 한 달이 다가와서야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가 있었다. 그만큼 고되고 세심한 사유 노동이 집적된 흔적을 대거발견할 수 있는 난해하고 복잡한 책이다. 더군다나 이 책이 나에게는 최초의 철학서인지라 더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전체성과 무한』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첫 머리부터 딱 잘라 말한다. 오죽하면 이 책을 두고, 클래식에 비유하여 기억의 문제가 아닌 이해의 문제라고까지 했을까. 분명 레비나스의 철학이 어렵기 때문에 저자가 쉬운 언어로 해설을 덧붙였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차례 갑갑함을 느껴가며 간신히 완독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기서의 완독은눈으로 활자를 다 읽은 것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다.저자 역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십 년이상의 강의 경력을 쌓을 무렵에도 어려웠다고 회고했는데 생초짜인 내가 머리에 쥐가 나는 건 지극히당연할 일일 것이다.난해함 자체가 가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철학책이 어려워지기 쉬운 까닭은 있다. ...중략... 우리가 특정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는 것은 그 사유가 우리가 봉착해 있는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p16후설과 하이데거, 베르그송은 레비나스에게 큰 영향을 준 철학자인 동시에그의 주된 비판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들의 선이해가 따라야 읽기가 수월하다. 레비나스는 "나의 삶의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 (-p22)라고 술회했듯, 그의 철학은 20세기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무엇보다 전체주의와 전체론을 반대하고 극복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살해했던 20세기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해모든 철학이 무력하고 무책임했던 이유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인간의 얼굴에 대한 외면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윤리는 존재론에 앞선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우리의 삶은 타자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며환대하는 데서 성립한다. 타자는 무한하며 유한한 동일자인 나에 비해 높다. 하지만 타자는 강하고 위력적인 침탈자가 아닌 지극히 가난하고 약하고 헐벗은 자다. 타자는 낯선 자, 약한 자, 가지지 못한 자다. 이를테면이방인, 고아, 가난한 자, 병든 자 등이 그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지배의 관계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얼굴로 호소하고 명령한다. 이 외면할 수 없음이 책임이고 윤리다. 타자와 동일자 사이의 차이(difference)는 무관심(indifference)이 아니라 무관심하지-않음(non-indifference)이다. -p32욕망에서의 가치 기준 역시내가 아닌 타자에 있다. 이 욕망은 무한하다. 내가 죽어도 내 자식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해 욕망은 작용한다. 좋음에 대한 욕망,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좋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타자에 대한 욕망.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망이다. 레비나스는 들뢰즈나 가타리와 달리 우리 사회 내부에서 비롯하고 작용하는 내재적 욕망이 아닌 타자를 향한 초월적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을 내세운다. 그 욕망이 나아가는 곳은 동일자의 확장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타자의 외재성이다. 낯설고 약한 타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윤리의 지평이 참된 삶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처럼 죽음과의 대비로부터 삶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향유로부터 삶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을 먹는 것이 이 향유의 기본 형태다. 향유의 관계를 세계의 요소 속에 잠긴다고 표현한다. 즐김은 타자적인 것과 관계한다. 레비나스의 고유한 특색은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에 있다고 하겠다.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는 강점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일깨운다는 데에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해체 이전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존재론에 앞서기 때문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이해(理解)나 해석에 우선한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하는 데서 비롯한다. 주체 자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어떤 주체를 설정하고 그 주체에 의해 의미 세계가 구성된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레비나스의 견지와 큰 거리가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무게의 중심은 동일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게 놓인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이 우리를 주체로 분리시키고 자리 잡게 한다. 내 삶에서조차 내가 먼저일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삶은 타자의 호소나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모름지기 삶이란 어떤 반응과 더불어 성립한다.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다. 또 그 반응은 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기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이성에 우선한다. 세계에 대한 전체적 파악으로서의 존재론은 이런 인식을 체계화한 것이니만큼, 타자와 맺는 근본적 관계인 윤리에 앞설 수 없다.
여는 글 - 타자와 욕망
1장 전체성 너머의 윤리
―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그의 철학
레비나스의 풍모
생애와 저작
존재론과 윤리
타자의 무한성과 얼굴
향유와 환대
동일성 너머의 윤리
레비나스 철학의 발전
2장 윤리와 종말론 ― 전체성과 무한 서문 읽기
서문의 역할
독일어판 서문
종말론과 역사
3장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욕망
4장 욕망과 혁명
5장 향유와 노동
맺는 글
에마뉘엘 레비나스 연보
‘우리 시대 고전읽기/질문총서’ 발간사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