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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석가가 설한 진리가 깊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 증득해야 할 것이지 범부의 언설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리고 언설과 분별이 궁극 지점에서는 버려야 할 것이지만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불가피한 방편이라는 입장을 보이는 저자 한자경 교수. 그는 피안에 도달하여 버려질 뗏목이라고 그것을 아예 취하지 않는다면 피안에 다가갈 수 없지 않겠는가?라 말한다. 저자는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불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불교적 관점으로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무아(無我)라는 가르침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설해진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무아는 나란 결국 숱한 인연의 얽힘에 따라 생겨난 존재임을 뜻한다. 불교는 오온(五蘊: 몸, 느낌 지각, 의지, 인식 등의 다섯 가지 무더기)은 실아(實我)가 아닌 가아(假我: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형성된 임시적 자아)라 정의한다. 저자는 우주 모든 것의 역사가 나의 오온 안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마다에, 생각 하나하나마다에 기억의 종자로 담겨 있다는 말을 하며 전생을 이야기한다. 과거 나는 독일 군인이었을 수도 인도 승려였을 수도 시베리아 무당이었을 수도 있고 사슴이었을 수도 뱀이었을 수도 나비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존재가 여러 인연이 얽히고 설켜 이루어진 존재라면 그 여러 인연들을 놔두고 독일 군인이든 인도 승려이든 시베리아 무당이든 사슴이든 뱀이든 나비든 그 하나의 특정 존재로 어떻게 내가 한정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저자는 유식唯識을 설명하며 나의 경계가 인연화합의 연기를 따라 무한의 지평으로 확대되기에 나는 전생에 군인이나 승려나 무당이었을 수도 있고 사슴이나 나비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40 페이지) 저자는 연기(緣起)의 유전문(流轉門)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이라면 환멸문(還滅門)은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것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공(空)의 깨달음이란 개체의식의 생성 이전 또는 소멸 이후 그 자리에 드러나는 무한과 공이 무기물의 물질 또는 무가 아니라 자기자각성의 마음이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라 말한다.(27 페이지) 저자는 무한(無限: 모든 경계지어진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가 가지는 경계 없음 또는 한계 없음의 상태)의 마음, 공의 마음을 한마음, 일심 등이라 부른다.(30 페이지) 이는 주객대립이 아닌 의식의 철저한 비움을 통해 이룰 수 있다. 각각의 개체는 현상적으로 보면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무상한 존재이지만 그 무상한 현상 자체를 창출해내는 무한의 힘은 유정(有情)의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각각의 개체 내면에 개체성을 벗은 하나의 마음으로, 일심으로, 진여로 드리워져 있다(33 페이지)는 것이 저자의 지론(持論)이다. 유식(唯識)의 유식무경(唯識無境)과 화엄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세계는 마음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유식무경의 식, 일체유심조의 심은 의식(6識; 주객분별의 구도 아래 법경法境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식)이나 7識(말나식: 의식 플러스 자기의식)이 아닌 그보다 더 심층의 식인 아뢰야식(8識)이다. 저자는 우리가 의거해서 사는 세계가 하나인 것은 그것을 그려내는 우리 각자의 심층식이 보편적인 하나의 식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43 페이지) 유아론(唯我論)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가 객관 실유(實有)로 간주하는 이 세계가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임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44 페이지) 저자는 어느 날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알게 되는 것은 물의 있음이 아니라 물의 없음이라 말한다.(50 페이지) 즉 이미 물고기는 물속에서 물의 있음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은 물이 아니라 자신이 물을 안다는 사실이라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이는 한마음에 대한 본각(本覺)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이미 누구나 부처라는 말로 이어진다. 저자는 우리가 이미 한마음을 자각하고 의식하며 이미 알고 있음을 본각(本覺)이 존재한다는 말로, 그럼에도 또한 한마음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기에 그 한마음을 한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함을 시각(始覺)이 부재한다는 말로 설명한다. 지눌(知訥)이 일심을 알면 해탈하고 모르면 윤회한다는 말을 한 것을 두고 저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기에 그로 인해 윤회와 해탈이 갈리는가를 묻는다.(5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해탈(解脫)은 현실세계가 가상이라는 유식성을 깨달아 현실의 꿈을 깨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실재라고 간주하는 현실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유정(有情)의 식을 떠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식이 그린 세계일 뿐이라 말한다.(66 페이지) 저자는 꿈의 세계도 현실세계도 그것을 지각하는 유정의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일체가 환상이라는 이 앎 또한 환상인가? 물으며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색다르게 해석해냄으로써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참말이라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고, 거짓이라면 참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 역설이다. 저자는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하는 나는 거짓말쟁이로서의 ’나‘가 아니라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라고 말한다. 저자는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차원이 같은 자기지시적 성격을 갖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말을 예시하는데 사실 모든 것은 환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환상임을 모른 채 사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우리의 본성이 이미 영지(靈知)이고 각(覺)이라면 본성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아닌가? 달리 견성(見性)이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묻는다. 답은 이는 우리에게 영지와 본각이 있어 우리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7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불교와 독일 관념론은 인간 본성을 능동적 활동성의 마음으로 보지만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 망집(妄執)과 독단(獨斷)에 빠져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말이 끊어지고 상(相)이 사라진 그곳,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그곳에 비로소 마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80 페이지) 저자는 자기의식(본성)과 자기인식(견성)을 구분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구분을 빌려온 것이다. 칸트는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했다. 의식에는 직관적 내용이 없다. 저자는 인간이 지적 직관의 결여로 인해 자기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말이라는 뜻이라 설명한다. 의식은 일반적인 앎이고 인식은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앎이다. 저자는 중생은 본각(本覺: 공적영지空寂靈知: 무한의 공이 스스로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것 자체로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의 불각(不覺)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95 페이지) 시각(始覺)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불교가 강조하는 견성(見性)은 성(性; 불성佛性)을 직접 관(觀)하는 것으로 이는 성에 대한 추론적 사유가 아닌 직접적 직관이다. 저자는 마음의 내용, 마음의 상들을 지워 나가면서 마음 대상이 사라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혼침(昏沈)에 빠져들지 않고 깨어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 자체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101 페이지) 저자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을 말한다. 성(惺)은 깨어 있음을, 적(寂)은 의식이 고요하게 멈춘 상태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생명활동만이 있는 원초적 상태에서는 미세자극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자극들을 모두 감지했는데 강한 외적 자극에 익숙해져 미세한 자극들에 둔감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성성적적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꿈과 깨어있음이, 의식과 무의식이,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저자는 무명을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진정한 견성(見性)이 있지 않다면 현상적 자아의 무한한 자기 확장과 비아(非我)의 부정은 아집에 가득 찬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09 페이지) 저자는 유식(唯識)과 현상학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밝힌다. 유식과 현상학 비교에 실마리가 되는 말은 ’사태 자체에로’이다. 현상학과 유식은 세계를 인간 주관의 능동적 구성작용에 의해 구성된 산물 즉 현상으로 간주한다.(139 페이지) 유식의 주관의 능동적 작용은 식전변(識轉變) 과정이고 현상학에서의 그것은 지향적 구성 작용이다. 식전변이란 식(識)이 경(境)을 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현상학은 초월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를 현상(現象)이라 부르고 유식철학은 아뢰야식에 의해 전변된 아(我)와 법(法)을 가(假)라 부른다. 현상학은 현상과 본질을 대립적으로 보는 이원론과 구분되는 입장으로 사물의 본질이 사물 현상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현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유식은 일체가 실유성이 없는 공(空)일 뿐이라는 중관학파에 기반을 둔 입장으로서 일체는 공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묘하게 나타나는 묘유(妙有)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가(假)란 개념을 사용한다.(155 페이지) 유식의 경우 윤회의 주체, 전변의 주체인 아뢰야식을 넘어설 것을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 즉 윤회의 과정을 넘어서는 해탈의 주체는 더 이상 윤회의 주체가 아니므로 망식(妄識)이라는 의미와 아뢰야식이라는 이름조차도 벗어던진 상태이다.(156 페이지) 현상학이 구성된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의도한다면 유식은 구성된 세계로부터 뿐 아니라 구성하는 자아로부터의 자유까지를 의도한다.(157 페이지) 후설 현상학이 의식 자체가 지향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데 비해 유식은 전변된 결과에 집착하지 말 것과 더불어 그 전변과정 자체를 넘어설 것까지도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59 페이지) 저자는 중생과 부처, 무명과 지혜, 욕망과 자유, 그 둘이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묻는다.(165 페이지) 저자는 삶에는 윤회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탈의 길도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해탈의 길이란 욕망을 자각하되 따르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176 페이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 욕망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지켜보는) 것이다. 저자는 공의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은 일체의 경계짓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욕망, 애정과 집착을 가상(假象)으로 생각하여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라 말한다. 반면 윤회와 해탈이 대립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삶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지적한다.(177, 178 페이지) 저자는 윤회를 벗고 해탈한다는 것은 윤회하는 다른 인간들을 남겨둔 채 홀로 무대 밖으로 비상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의 삶이 해탈적 삶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결국 해탈이란 윤회의 완성이지 부정이 아니라고 지적한다.(180 페이지) 저자는 중생이 부처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자각하는 주체성의 확립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저자는 연기(緣起)를 일체 만물이 고립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의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것으로 정의하며, 무아(無我)는 자아가 개별 실체가 아니라 연기의 원리에 따라 중연(衆緣)이 화합하여 형성된 가(假)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192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불교에 있어서도 중생의 욕망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성적인 욕망이라는 말이다. 중생이 끊임없이 육도윤회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성욕이다. 그러나 윤회를 일으키는 이 성욕은 부모의 성욕이 아니라 부모의 성행위 결과 태어나게 될 당사자의 성욕이다.(211 페이지) 근원적으로 성욕은 모태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중음신(中陰身)의 욕망이다.(211, 212 페이지) 유정(有情: 정을 가진 존재,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이 윤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진여성(眞如性)을 알지 못하는 무명 상태에서 현상세계 만물을 실유의 존재로 집착하기 때문이다.(212 페이지) 부록으로 실린 무아론 논쟁에서 저자는 불교가 업과 윤회와 해탈을 주장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를 설한다고 말한다.(250 페이지) 저자는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방편교설로 읽어내는 것이 간단한 해결책일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는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를 말한다. 업을 받는 사람은 있어도 짓는 자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 부록은 정승석 교수의 ‘윤회의 자아와 무아’ 및 김진 교수의 ‘칸트와 불교’ 등 윤회와 무아 사이의 관계를 밝힌 책들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전언(傳言)이다. 정승석 교수는 주체 없는 윤회가 가능한 것을 불교에서 윤회란 자기동일적 실체(자아)의 연속이 아니라 단지 업의 상속일 뿐이라는 데서 찾는다.(258 페이지) 정승석 교수는 이렇듯 자아 없이 이루어지는 윤회를 무아윤회라 말한다. 저자는 업의 상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258 페이지) 그리고 업의 상속으로서의 윤회 즉 무아 윤회가 가능하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무아 해탈도 가능한가 묻는다.(25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정승석 교수는 해탈을 삶에서 뿐 아니라 죽음에 있어서도 윤회의 고리를 벗고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어떤 절대의 경지가 아니라 단지 이 현세의 삶에서 무아를 깨달음으로써 아집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달관의 경지로 해석하고 있다.(259, 260 페이지) 그렇다면 저자가 말했듯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 윤회를 사후 세계의 문제가 아닌 현세적 삶과만 관계된 것으로 보는 정승석 교수의 논지에서라면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 쟁점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정승석 교수는 “불교가 그와 같이 현세적 인간의 자기개조 또는 자기변신의 가르침에 그칠 뿐 사후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애당초 정교수가 문제 삼고자 한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도 문제로서 성립하지 못했을 것.”(261 페이지)이라는 말을 했다. 정승석 교수는 “윤회는 사후세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세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기개조 또는 변신의 문제“라는 말을 했다. 김진 교수의 ‘칸트와 불교’는 나도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어서 특별히 더 관심이 간다. 저자에 의하면 김진 교수는 무아설과 윤회설(사이의 모순)을 아포리아로 규정했다. 김진 교수는 이 아포리아가 불교 내에서 해결되지 않아 자신이 칸트의 요청 이론으로 해결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김진 교수는 석가의 무기(無記: 침묵)를 불가지론으로 해석한다. 김진 교수는 자아의 존재는 이론적 차원에서 부정되지만 도덕실천적 차원에서 요청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오늘의 내 몸이 어제의 내 몸과 인과관계로 연관되어 있고 그와 같은 인과관계의 연쇄고리를 따라 과거의 내 몸 또한 연관되어 있다면 비록 과거의 내 몸과 오늘의 내 몸 사이에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과거의 내 몸과 오늘의 내 몸을 같은 몸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271 페이지) 현상적 두 몸을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그 현상 배후에 자기동일적 몸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 현상적 두 자아를 하나의 자아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자아동일적 실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김진 교수가 말하는 요청적 자아가 무엇인지 묻는다. 저자는 불교는 깨달음의 주체를 자아라 규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깨달음이 바로 자아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회하는 것은 일심 안에서 업에 따라 형성되는 가아(假我: 오온五蘊)일 뿐이라 말하는 저자는 업력을 따르는 윤회주체와 업력을 벗는 해탈주체의 관계는 마치 꿈 속의 나와 깨어난 나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286, 287 페이지) 저자는 꿈속에서 우리가 서로 연기(緣起)로 맺어져 있는 것, 윤회세계가 우리의 공업(共業)으로 인한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는 것은 꿈꾸다가 깨어날 나와 네가 결국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으로 궁극적 주체는 일심(一心)일 뿐 자아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287 페이지) 이제 다음 책은 한자경 교수의 ‘일심의 철학’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가르침을 불교 논리 자체에 대한 설명을 통해, 또 서양철학과의 비교철학적 고찰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고, 이어서 그런 불교의 논리가 어떻게 현대사회에 유용한 윤리적 가르침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근년에 전개된 바 있는 무아와 윤회와 해탈에 관한 논쟁의 글들이 덧붙여져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불교 개념과 서양철학의 개념들을 짝지어 표현하고 있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나 피히테의 절대자아, 헤겔의 정신 개념 등에 비견되는 진아, 현상학의 세계관과 유식무경의 경지 등이 그 예라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전적으로 유식불교에 의지하여 불교철학을 해명하는 동시에 서양철학의 방법으로 불교 철학을 바라보고 있다.


제1장 불교의 근본사유
1. 무아와 연기
2. 공과 일심
3. 유식무경
4. 본각과 시각
5. 윤회와 해탈
6. 상대와 절대

제2장 불교와 서양철학
1. 불교와 독일관념론 - 공적영지와 지적 직관
2. 불교와 마르크시즘 - 종교성과 소외
3. 불교와 현상학 - 유식의 아뢰야식과 후설의 초월자아

제3장 불교와 현대윤리
1. 불교의 생명관 - 욕망과 자유의 갈림길
2. 불교의 생태학 - 현대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3. 불교의 윤리관 - 불교의 불음계와 현대의 성윤리

부록: 무아론논쟁
1.무아와 해탈의 문제 : 정승석의 윤회의 자아와 무아에 대한 서평
2.무아와 윤회의 문제 : 김진의 칸트와 불교에 대한 서평
3. 무아와 윤회 그리고 해탈 : 김진 교수의 반론에 대한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