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광복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그 때까지, 미군정청과의 갈등 그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것이 전부인양 알고 있기도 하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우리의 과거를 한탄하고,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때의 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3년의 기한으로 1945년 8월 해방 전후부터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년 8월까지, 3년 동안 일어난 일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다. 이 책은 그 네 번째 책으로 1946년 5월부터 8월까지 넉달 동안, 해방 1주년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담고 있다. 그 기간 동안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가 부제로 달은 것 마냥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으로 칭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고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당시의 좌우합작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발버둥이었다는 점이다.
1946년 5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의 정회로 연합국 합의에 의한 조선독립 추진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이 시기 역시 1,2,3권과 마찬가지로 이북에서의 변화는 단순하고 순탄하게 진행된 반면, 이남에서는 여러 주체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점령군인 미군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김구, 이승만의 반탁세력으로 대표되는 극우세력이, 왼쪽에는 박헌영의 공산당이 주가 된 극좌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극우는 계층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었고, 극좌는 이념에만 매달린 형국이었으며, 이들의 무한투쟁은 중도좌파나 우파에게 극좌나 극우로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미군정청은 좌우합작을 시도한다. 그들은 형식상이나마 남북 단일국가 수립에 우선권을 두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중도파에 의한 좌우합작이 성사되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고, 극좌는 고립된다고 본것이다. 이는 좌우합작과 동시에 진행된 극좌에 대한 탄압 - 이른바 정판사 위폐사건, 해방일보의 정간 및 폐간 – 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좌우합작은 미군정이 만들어준 장(場)이었기에 비록 현실적인 힘은 없었지만, 거기에 참여한 중도좌파나 중도우파사람들은 조선인의 염원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여운형과 허헌으로 대표되는 중도좌파, 그리고 김규식과 원세훈이 중심이 된 중도우파, 이들은 한민당의 자금력, 공산당의 조직력, 그리고 극우파에게 장악된 경찰력 등 폭력적 요소들에 지배 받고 있던 조선 남반부의 상황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지원은, 이들의 좌우합작 노력의 추동력이 되었지만, 그것은 곧 한계가 되어버렸다. 미군정청장 하지는 좌우합작을 통해 미국과 미군정을 지지하는 중도우파 중심의 우익이 확장되는 통일전선을 꿈꾸었고, 그 결과 그들이 생각하는 좌우합작의 목적은 미군정청의 통제를 받고, 남조선 주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의 설치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두가지 조건은 서로 상치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지지하는 좌우합작에 대해 명분에서 밀리던 극우와 극좌는 겉으로는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좌우합작의 성공은 곧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일 이기도 했다. 끝없는 방해공작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지사다. 여기서 우리는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극우는 통일전선을 회피하였다. 그것만이 친일파 처단을 피하고,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민족국가의 건설보다는 외세에 의존하는 분단국가를 원했다. 그 해 6월, 이러한 좌우합작의 성공여건을 파괴할 목적으로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 발언을 했던 것이다. 박헌영의 극좌 또한 마찬가지이었다. 현실정치 속에서 헤게모니 획득을 위한 정략차원의 투쟁노선이, 그들에게는 우선 당장 민족통일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즉 좌우합작은 이들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해방 1주년을 맞이한 1946년 8월, 극우의 수족인 경찰은 공안정국을 형성하며 좌우합작의 좌측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 하며, 본격적으로 좌우합작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낯익은 모습들이다. 바로 현재의 정치와 같기 때문이다. 여야로 갈린 수구세력들, 그리고 양극단에 포진한 극우와 극좌세력들, 그들은 해방이래 아직도 적대적 공생관계에 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정권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정권을 잡던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저자는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중도파들을 재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해방공간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끼친 해악의 대부분은 조선을 망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식하고 게을러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했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6년 9월 이후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또 어떠한 교훈을 얻을수 있을까? 그의 해방일기다음편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 해방일기 4권 이 다루는 기간은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5월에 시작되는 한편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 속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진다. 한편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노동당으로 창당되면서 좌익의 주도권이 평양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하는 극좌 노선을 택한다. 김기협은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가 왜 열세에 빠졌는가? 를 주제의식으로 하여 좌우합작 국면에서 극우, 극좌라는 양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쓴 중간파의 과업을 소개한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임을 강조한다.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의 출간으로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 ‘해방 1년’을 4책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 의 정신에 따르고자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저자의 바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1946년 5월 2∼ 6일
1946. 5. 2. 협의 자세를 안 갖춘 협의상대’ 신청자들
1946. 5. 3. 미소공위에 배짱으로 임한 미국대표단
1946. 5. 4. 전범재판이 없던 유일한 나라 조선
1946. 5. 6. ‘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소공위 중단책임이 미국에게 있는 거 맞죠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
1946년 5월10∼30일
1946. 5. 10. 조봉암이 한국현대사에 던진 첫 충격
1946. 5. 13. 좌익탄압의 에스컬레이션
1946. 5. 16. 좌익탄압의 절정 ‘정판사 위폐사건’
1946. 5. 17. 해방공간 최대의 위폐범은 미군정
1946. 5. 23. 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사건
1946. 5. 26. 우리의 수도는 아직도 ‘게이조(京城)’입니다
1946. 5. 27. 한민족의 분단 일본이 벌써 저질러놓은 짓
1946. 5. 30. 폭압적 ‘직접통치’에 나서는 미군정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독립’을 너무 쉽게 생각한 민족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5월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
1946년 6월2∼13일
1946. 6. 2. 조선의 일본인과 중국의 조선인
1946. 6. 3. 분단 건국을 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 6. 5. 이승만의 ‘치고빠지기’ 작전
1946. 6. 13. 1946년 여름의 콜레라 사태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만담가 신불출의 ‘국기모독죄’
4 좌우합작 추진
1946년 6월14∼30일
1946. 6. 14. ‘좌우합작’에 임하는 하지의 꿈
1946. 6. 16. 하지에게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던 좌우합작
1946. 6. 17. 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1946. 6. 20. 김규식의 등장
1946. 6. 21. 유민(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1946. 6. 22. 북핵문제 장택상에게도 책임이 있다
1946. 6. 24. 좌우합작 불리한 싸움이지만 민족대의를 받드는 싸움
1946. 6. 27. 1946년 여름 이남주민들의 고통
1946. 6. 28. 소련군의 군표와 미군의 군표
1946. 6. 30. 좌우합작 노력에 시동을 걸어준 미군정의 지원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군정 좌우합작에 방해나 안 했으면…….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6월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
1946년 7월 1∼28일
1946. 7. 1. 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1946. 7. 4.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차이
1946. 7. 5. 간첩혐의를 불러온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1946. 7. 7. 좌우합작 분위기를 보여준 3의사 국민장
1946. 7. 11. 박헌영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1946. 7. 12. 언론의 자유에 관심 없던 동아일보
1946. 7. 14.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1946. 7. 15.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1946. 7. 18. 여운형 습격 역시 극우의 소행이었다
1946. 7. 19. 3상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의 의미는
1946. 7. 21. 이북에서 남녀평등법을 내놓는 동안
1946. 7. 22. 출발선에 선 좌우합작
1946. 7. 25. 박헌영 일당의 좌우합작 좌초 시도
1946. 7. 26.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1946. 7. 27. 아직도 폭력은 우익의 것
1946. 7. 28. 공산당의 정판사 사건 ‘공판투쟁’ 전략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한탄은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7월
6 해방 1주년을 돌아보다
1946년 8월1∼31일
1946. 8. 1. 종속과 독재의 발판이 된 민족 열등감
1946. 8. 2. 박헌영에게서 해방된 김일성
1946. 8. 4. 대쪽 아나키스트 유림(柳林)을 생각한다
1946. 8. 5. 최고 원로 김철수를 배신한 박헌영
1946. 8. 8. 미군정이 잘한 일이 무엇? 98퍼센트가 할 말 없어
1946. 8. 9. 전평과 대한노총의 경쟁
1946. 8. 11. 경찰과 동아일보 가 꾸민 8·15 공안정국
1946. 8. 12. 해방 1주년의 사회상 오기영의 탄식
1946. 8. 15. 궁지에 빠진 김구
1946. 8. 19. 여운형 박헌영과는 이제 그만…….
1946. 8. 22. 잉여물자 ‘차관’에 좋아 날뛰는 이승만
1946. 8. 23. 극렬분자 반동분자 그리고 기회주의자
1946. 8. 24. 박헌영 극좌노선의 뿌리
1946. 8. 29.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사건
1946. 8. 31. 북로당은 왜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좁아지기만 하는 공산당의 길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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